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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사항

Funeral Director Association of Korea

경주문무대왕릉
| 대한장례지도사협회 | 조회수 10,114
문무왕릉, 애국의 얼 서려있는 수중왕릉

          
                                                                    (상조매거진 보도자료   펌)         
신라의 30대 임금인 문무왕은 삼국통일의 초석을 세운 무열왕의 아들로 당대의 명장 김유신과 함께 삼국을 통일의 위업을 이룩한 왕이다. 당시는 국내에 존재한 크고 작은 세력들과의 다툼 외에도 왜구와 당의 침략이 잦았던 시기로서 통일 이후 문무왕은 국내의 기강을 다잡는 한편 외세에 맞서기 위해 여느 왕보다 많은 고초와 희생을 치러야 했다. 때문에 현대의 문무왕은 부국강병과 희생의 리더십으로 수많은 교과서와 관련 서적으로 남아 많은 사람들이 그의 정신을 기리고 있다. 특히 문무왕 사후 해중왕릉으로 불리는 그의 무덤은 생전의 그의 기개가 어느 정도 였는지 알 수 있는 중요한 단서로 남아있다.
 
승천을 기다리는 용의 무덤

동해안에서 200M에 위치한 사적 제158호에 등재된 문무왕릉은 지상에 우뚝 솟은 여느 위업가들이 세운 봉분 형태의 무덤과 달리 수중에 암석들과 함께 시신이 안장돼있어 다른 명칭으로 해중왕릉이라고 불리고 있으며 또 다른 이름으로는 대왕암이라는 명칭이 있다.
이 무덤은 국내의 고분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신라인의 독창적인 발상과 메시지가 담겨있는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무덤은 국교로 앞세운 불교의 전통을 따라 유골을 화장시켰으며 화장된 유골을 동해에 묻고 크고 작은 암석들을 비치했다.

이러한 그의 독특한 안장법은 문무왕의 호국정신에 의거한 것으로 삼국사기에 따르면 문무왕은 “동해에 유골을 묻으면 그곳에서 용이 되어 왜구의 침략을 막아내겠노라”라고 유언을 남긴 것으로 전하고 있다.
한편 무덤의 형태는 지난 1964년에 실시된 신라오악학술조사단의 보고서에 따르면 암초의 중앙부를 파내고 육지에서 운반해 온 거석하나를 깔고 거기에 신골을 봉안했다. 이와 함께 중앙부에 물을 가두어 두기 위해 동서로 긴 수로를 마련했다고 한다.

또한 암초의 둘레에는 크고 작은 열두개의 암석이 돌출되어 있어 십이신장의 호위처럼 보인다고 서술했다.
특히 대왕암은 자연 바위를 이용하여 축조된 것으로 가공의 손길이 닿지 않아 자연 그대로의 투박한 외형을 만날 수 있다. 그러면서도 내부에는 인공수로를 건설해 물을 가두어 두고 신라인의 건축기술을 접목해 바닷물은 동쪽에서 들어와 서쪽으로 나가게 만들어 항상 잔잔하게 연출할 수 있었다.

시신의 위치는 넓적한 거북모양의 돌이 덮여 있는 무덤의 가운데 매장되어 있을 것이라 추측하고 있다.
한편 문무왕의 호국정신과 기개를 그대로 물려받은 그의 아들 신문왕은 아버지의 위업을 치하하고 계승하기 위해 동해 근처에 감은사를 세워 법당아래 동해를 향한 배수로를 만들어 용이 된 문무왕이 왕래할 수 있도록 설계하기도 했다.
 

전란에서 힘을 키운 문무왕

문무왕의 무덤을 통해 어렴풋이 살펴본 그의 성정은 끓어 오를 듯한 충정과 패기가 느껴진다. 이는 아무래도 아버지 무열왕이 보여준 전방위적 영토확장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 으로 보인다. 특히 아버지인 무열왕이 삼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서거하고 곧바로 즉위한 문무왕은 상중임에도 불구하고 당과 연합해 고구려를 침공하는데 주력했다. 이점만 보더라도 그의 기개가 범인들의 그것과는 다르다는 것쯤은 눈치 챌 수 있을 것이다.
당시 그의 나이는 36세였고, 이미 당대의 명장 김유신과 함께 수많은 전장에서 공적을 세우고 기량을 갈고 닦은 명장이었다. 책상에 앉아 집무를 보는 여느 임금과는 확실히 선을 긋는 임금이었다.
문무왕이 즉위한 661년부터 약 20년 동안은 백제의 부흥군, 고구려와 당나라와의 기나긴 전란의 소용돌이였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때 문무왕은 갖은 수라장에서의 경험을 통해 실전 외교술을 몸으로 체득할 수 있었다. 자신의 힘으로 나라를 지키는데 무리가 따르면 뇌물을 건네기도 하고, 통일 이전에는 외세와 결탁하기도 하는 등 자국에 도움이 되고자한다면 그는 일절 다른 생각은 하지 않았다.
혹자들은 이러한 왕의 성정 탓에 당을 한반도로 불러들인 것을 책잡아 그를 지나친 사대주의, 외세의존적 국왕으로 폄하하는 시선도 존재한다.
그러나 이는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것이다. 그의 이러한 선택은 전란의 한가운데에서 나라를 지키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었을 것이다.
백성과 자국의 안위를 위해 자신의 일신과 명예는 땅에 추락해도 좋다고 여기던 그의 호국정신인 셈이다.
그의 효율주의는 정치를 행할 때도 마찬가지로 작용했다.

나라를 효과적으로 다스리기 위해 소경을 확충해 동남쪽에 치우진 경주의 불편함을 줄이는 등 중앙과 지방 행정조직을 개편해 비효율적인 구조를 바꾸는데
힘썼다. 통일 이후에는 신라에 걸림돌이될 것이 불 보듯 뻔 했던 당과의 결전에서 승리해 나라를 지켜냈으며 죽어서는 왜구의 침략에 항거하기 위해 스스로 수중에 안치
돼 용이 되어 신라를 지키겠다고 호언했다.

아버지 무열왕의 터프한 성미와 영리함을 이어받은 문무왕은 철저히 실리를 따지는 인물이었다. 그가 앞서 보여줬던 모든 효율적인 의사결정이 이를 대변해준다. 문무왕이 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던 것도 이 같은 그의 진보적인 철학과 패기 넘치는 행동력이 먹혀들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오늘날 역사가 그에 대해 평가하는 시각은 두 방향으로 나뉘지만 한반도의 정체성을 하나로 규합하고 외세에 항거한 영웅이란 점에서는 누구도 이견을 말할 수 없을 것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