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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uneral Director Association of Korea

장례용어 상식
| 류재승 | 조회수 68

장례용어 바르게 사용하기
생로병사(生老病死)의 길

장례 용어의 정의를 찾아보자. 언어의 난무함으로 현실이 외곡되고 의미를 잃어가며 두서 구분이 없어 소통의 장벽이 생겨난다.

장례인의 전문가 한사람으로서 장례식에 쓰여지는 언어들을 보면 가끔은 눈살을 찌푸린다.

죽음에 이르는 과정과 죽음에 대한 의미 또한 그렇다.
 
춘추필법(春秋筆法)은 죽음을 이렇게 기록하고있다.

소인이 죽으면. 사(死)
육신의 죽음 몸이 죽는것
선비가 죽으면. 망(亡)
도리의 행함을 마침
군자가 죽으면. 종(終)
군자의 도리의 마침
제왕이 죽으면. 흥(薨)
황제가 죽으면. 붕(崩)

사망.임종.임훙.훙서.서거.붕어
死亡.臨終.臨薨.薨逝.逝去.崩御 등은 여기서 비룻됐다고 한다.

생명은 소중하기에 죽음을 맞으면 존중의 뜻으로 한단계 올려서 규정 종(終)이라고 하였다. 도리의 행함을 마침이라는 뜻이다.

요즘 상가를 방문해 조문을 할 때도 방명록(芳名錄)이 부의록(賻儀錄)조의록(弔意錄) 으로 표기되는가 하면 

방명록에 작성(作成)을 서명(誓名)이라는 말로 사용한다. 묵례(默禮)를 목례(目禮)로 쓰기도 한다.

방명록(芳名錄) 을 비치하는 것은 꼭 이름을 남기라는 것이 아니다. 방문한 사람이 이름을 기록함으로써 쉽게 알기 위함이다.

부의록(賻儀錄)은 금전출납부와 같은 것이며 물품이나 부의금을 적는 문서다.

조의록(弔意錄)은 애도의 뜻을 담은 글을 전하는 기록을 남기는 문서다.

작성은 의지이며 서명은 관계이다. 서명은 계약과 같은 의미를 두고 있다.

목례는 상호간의 가벼운 인사이며 묵례는 상대에게 존경의 표시로 고개를 숙이는 것이다.

상장례는 애도(哀悼)하는 의식의 슬픔으로 보내는 예의이며

제례는 그리워하는 예의 애도(哀悼)나 추모(追慕)의 의미이다.

장례식 중에 마음을 표현하고 전하기 위하여 추도사 또는 추모사라고 글을 만들어 올리는 경우도 있는데 

자손들은 갑자기 잃어버린 가족을 슬퍼하기도 바쁜데 추모의 여유가 있겠는가

전통에는 제문을 만들어 올리면 축관이 동편에서 제문을 잃었다.
슬퍼하며 올리는 글이라면 애도문이라 할수도 있을것이다.

발인전에 하는 영결식(永訣式) 또한 이 세상 에서의 마지막 이별함을 알리는 의식이다.

어떤 사람은 영결식이 잘못이라는 사람도 있다 그 사람은 이 세상에서 다시볼수 있는 사람인가 보다.

지나간 것은 다시오지 않는다.

오랜 역사와 세월속에 규정한 말들을 바꾸고자 한다면 온고지신(溫故知新) 즉, 옛것을 바로 알고 새로이 접목함이 맞을 것이다.

이러한 말들이 난무하는 현실을 보면 존중받지 못하는 죽음의 통과의례(通過儀禮)가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통과의례’란 사는동안 도리로서 지키며 행하는 의례라는 뜻이다.


어른이 되는 관례(冠禮)

가족을 이루는 혼례(婚禮)

죽은자를 보내는 상례(喪禮)

살아 있으면서 은혜의  감사함을 전하는 제례(祭禮)


이것이 사람이 살면서 지켜야 할 인륜의 도리라고 한것이다,

세상은 잠시 머물다 가는 시험에 무대와도 같으며 휴식처와 같다. 

영원히 살 것처럼 욕망에 사로잡혀 살아간다. 우리의 삶은 혼자사는 것이 아니며 함께하는 삶이다. 

알면서도 행하지 못하는 것은 모르는 것만 못하다.

누군가의 몸을 빌어서 태어나고 누군가의 희생(犧牲)을 통하여 성장하며 

결국 누군가의 손에 의해 삶이 거두어지는 생노병사를 조금은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모든 것을 눈으로 보고 확인하려는 습성과 보이지 않으면 믿지 않는 불신의 마음. 

공기는 보이지 않아도 있고 사람의 마음도 보이지 않지만 교류를 통하여 믿는다. 

세상은 물리적 이치와 과학으로도 규명되지 못하는 진리가 있다.

보이지는 않지만 존재하며 느낄수는 없지만 움직이는 많은 것들이 있음을 믿어야 한다.

잠시의 삶에 얽매여서 도리로서 해야할 일들을 잃고 산다면 그것은 사람의 삶, 인간의 삶이 아니다. 

결국 인륜(人倫)의 가치를 잃는 것이다.

*******
삶의 의미도 제대로 모르면서 어찌 죽음의 의미를 알겠는가.

산 사람도 제대로 섬기지 못하면서 어찌 죽은 사람을 섬길 수 있겠는가?

삶을 잘 알면 죽음 역시 알 수 있고, 삶을 분명히 알지 못하면 역시 죽음도 알지 못한다.

현실의 삶의 도리가 결코 죽음의 도리와 다르지 않음이다.
논어 선진편(論語先進篇) 에 나오는 이야기다.


圓亭 류재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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